남기고 싶은 뭉클함.

전태일 46주기에 부쳐.

그레이스:) 2016. 11. 14. 00:41

돌이켜보니 이제 9년째 인것 같다. 전태일이라는 사람을 알게되고 그전까지 분절적으로 습득되어 혼란스럽던 내 사고가 명확한 방향으로 전환된 지.

오늘은 내게 두번째 예수인 전태일열사의 46주기다. 그의 삶의 지향이 '나' 만 존재하는 이기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나와 너'라는 '공공 선'을 지향하는 인류의 보편가치들을 확산하였기에, 여전히 역사적 정당성을 넘어 많이 이들의 기치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전태일의 분신이 그랬고, 80년 광주의 시민군이 그랬듯 '시위'란 한 사회에서 권력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의 최후의 저항행위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촛불집회 때마다 거론되는 '평화-폭력'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은 사실 권력자들이 약자에게 던지는 덫이 아닐 수 없다.
시위현장에서 이미 '통치적 폭력'이 보이게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이러한 시위 정황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누구의 폭력에 함께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인가 우리에게 물었던 예수처럼.

어제 100만 광화문 시위는 '박근혜-퇴진'이라는 구호를 통해서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가 무엇인지, 그 사회는 어떠한 가치관을 추구하고 제도화하는 사회여야 하는지에 대한 치열한 자기학습과 토론을 통해서 시민들이 원하는 사회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단은. 많은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오는 이 현실이 고무적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결정 자체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기때문에.

여전히 각자의 자리에서 평화를 위해 싸우는 이들이 있다. 자꾸자꾸 광장에 나오다보면 그들의 외치는 목소리가 나와 다른 것으로 선 긋지 않고 조금씩 귀 기울이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나와 너'로써의 가치들이 확산될 수 있지 않을까.

어제 발언에서 "이 나라가 꿈같은 세상을 만들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꿈이라도 꿀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하는 한 여중생에게 삶의 평화를.
노동자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삶의 평화를.
장애인들도 가고싶은 곳에 갈 수 있는 삶의 평화를.
허망하게 가족을 잃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삶의 평화를.

이미 너무 많은 권위의 폭력에 맞서고 있는 우리들에게 집회의 평화가 아니라 삶의 평화를.



사진 하나 붙이기.
그렇게도 꿈꿔왔던 우리 모임에서 함께 깃발 들고 시위에 참여하기.
왜 그렇게 깃발을 드는 일을 간절히 바랬을까.
하는 마음은 안도현의 시로 대신한다 :)




우리는 깃발이 되어 간다  
                                                                 
안도현



처음에 우리는 한 올의 실이었다
당기면 힘없이 뚝 끊어지고
입으로 불면 금세 날아가버리던
감출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나뉘어진 것들을 단단하게 엮지도 못하고
옷에 단추 하나를 달 줄을 몰랐다
이어졌다가 끊어지고 끊어졌다가는 이어지면서
사랑은 매듭을 갖는 것임을
손과 손을 맞잡고 내가 날줄이 되고
네가 씨줄이 되는 것임을 알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우리는 한 조각 헝겊이 되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바라ㅏㅁ이 드나드는 구멍을 막아보기도 했지만
부끄러운 곳을 겨우 가리는 정도였다
상처에 흐르는 피를 멎게 할 수는 있었지만
우리가 온전히 상처를 치유하지는 못했다
아아, 우리는 슬픈 눈물이나 닦을 줄 알던
작은 손수건일 뿐이었다
우리들 중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깃발이 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세상이라면
한 올의 실, 한 조각 헝겊이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서히 깃발이 되어간다
숨죽이고 울던 밤을 훌쩍 건너
사소한 너와 나의 차이를 성큼 뛰어넘어
펄럭이며 간다
나부끼며 간다
갈라진 조국과 사상을 하나의 깃대로 세우러
우리는 바람을 흔드는 깃발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