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스러운 일상/새벽이 빌려준 마음 13

자기이유

결혼을 앞두고 있다. 4일 앞으로 다가온 “결혼”이라는 하나의 관문을 마주하며 지나온 내 생의 크고 작은 선택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가장 큰 화두가 된 두 주제만 우선 정리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신앙 사실 신앙은 엄밀히 나의 선택이라기보단 주어진 것에 가깝다. 태어나보니 아빠가 목회자였고 우리집은 교회였으니 부르는 노래는 모두 찬양이었고 만나는 사람은 모두 교인이었다.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장. 그렇게 내 삶의 지향과 테두리가 주어졌다. 자아가 생기며 스스로에게 신앙이 무어냐 정의내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현재도 약소하나마 고민중에 있으나, 신앙이란 이땅에서 이루어가야 할 하나님나라를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그분의 삶의 지향을 따라 몸된 지체로 사는 것, 고백한대로 사는 것이라고 여긴다. 스스로에..

마음의 근육이 조금 생겼다.

우울증을 진단받게된 원인이 딱 하나는 아니겠지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직장이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떠오르는 기억들에 괴로웠는데, 정말 인생에서 삭제해버리고 싶은 시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참 신기하게도 시간이 조금 지났다고 찐하게 맺은 인연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제는 만날 수 있는 용기를 내볼 마음의 근육이 조금 자라기도 했고. 미루고 미뤘던 동료와의 만남을 오늘 했다. 긴장됐는데 그 마음이 무색할만큼 소소한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많이 웃기도했다. 그간 만남을 미뤄왔던게 아파서였다는 이야기도 전할 수 있었다. 그랬었구나, 대수롭지 않은 듯 덤덤히 말해주는 그 마음에 나는 또 마음이 가벼워졌다. 만나고 나니 어제 헤어지고 오늘본 것 마냥 그저 반갑기만 한데 뭐가 그렇게 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올라올때면

어떤 두려움은 자연스레 소멸되기도 하고, 어떤 두려움은 반복되어 마주하면서 스스로 대처능력을 갖게해주기도 한다. 가장 겁이나는 두려움은 내가 스스로 먹이를 주고 있는 나의 트라우마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이따금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채 소화하지 못하고 남겨둔 그 트라우마들이 떠오른다. 얄궂은건 무언가 새로운 시작을 해보려 할 때, 훅 떠올라 이내 그 두려움에 잠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프기 전에는 무얼 두려워하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내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한다는 것이 큰 변화다. 그렇다고 늘 두려움에 맞서진 못하고 그저 '이런일들이 나를 두렵게하는구나'를 알게하는 정도? 그럴땐 그 두려움이라는 감정 뒤에 숨어있는 진짜 내 감정을 찾아보려 한다. 상실이 두렵다. 소중한 관계를 이대로 두면..

존재의 핵심은 내 감정, 내 느낌입니다.

어떤 모습의 삶이라도 내가 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하면 그 끝에 노이로제들이 반드시 기다려요. 심각한 공황장애나 우울증 이런거요. 그래서 내 존재로 다시 돌아와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죠. 근데, 내 존재라는게 뭘까요? 내 존재에 집중한다는게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진 않나요? 내 존재에 집중한다는건 어떻게 사는걸까?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존재의 실체가 뭘까요? 예를 들어 몸의 실체는 내 육체죠. 심리적인 실체는 뭔가요? 내 생각이나 신념? 취향? 가치관이나 견해일까요? 내 존재 실체의 핵심은 내 감정, 내 느낌이에요. 내 생각이나 신념, 가치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건 부모의 생각이거나 책에서 본 가치관, 스승의 신념인 경우가 많아요. 내 느낌, 내 감정은 오롯이 나에요. 어김없는 나에요. 힘..

누군가를 위해 울 수 있는 삶이기를

3달전부터 더이상 약을 먹지 않아도 우울감이 괴롭히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감사한일이다. 생을 마감하는 것이 내가할 수 있는 전부라고 여겨지던 어둠의 시간에서 이렇게 죽어버리는건 비겁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내가 아직 갚아야 할 빚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다. 사라지는 순간까지 누군가에게 폐를 끼칠 순 없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고 그 길로 나에게 가장 안정감을 주는 사람인 언니집으로 들어갔다. 살아야해서. 내 발로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을 찾아갔던 그 첫 날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몇년을 넘게 업무때문에 수도 없이 찾아갔던 곳이지만 병원 유리문이 그렇게 무겁게 느껴진건 처음이었다. 의사를 만나기 전까지 느낀 긴장감은 또 한번의 위기였지만 의사는 하루에도 수십명씩 만나는 사람중의..

고무나무 가지치기

고무나무가 빨리 자라서 가지치기를 했다. 쳐 낸 가지들 중에 몇개는 물꽂이를 했고, 머잖아 뿌리가 나왔다. 화분에 옮겨심고 보니 이 아이는 더이상 가지가 아니다. 또 다른 하나의 나무가 되어 쑥쑥 자라고있다. 요즘의 나는 가지치기를 당하고 팽겨쳐진 가지 중 하나인 듯 하다. 뿌리가 없으니 점점 마르고 썩어간다. 죽어간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기도 하고. 자기 혼자의 힘으로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는 나무는 없다. 영양분이 있어야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는데 영양분을 만나는건 운일까, 의지일까. 운 좋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의지가 필요하겠지. 내 삶을 어떻게 핸들링할지 결정해야 한다. 살고자 한다면 나에게 물과 흙, 햇살이 되어줄 영양분을 찾아내야 하겠지.

주문을 외워보자.

아발라바히야, 는 아니고. “나는 언제든 실수할 수 있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지난 실패가 내 삶 자체의 실패로 여길 필요는 없다. 그만큼의 많은 시도를 했다는 것이고, 그 시도는 내 삶이 아직 과정 중에 있다는 의미일뿐이다. “ 이라는 주문을 하루에도 몇번씩 주문처럼 외워본다. 언젠가 머지 않은 날에는 주문이 아니어도 받아들일 수 있겠지 :)

나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가장 두려운 질문이다. 문득 떠오른 질문 하나에 마음은 또 무너지고, 무너진 마음에 지지 않으려 뭐라고 하려고 이렇게 글을 남긴다. 이전의 나를 지우고 다시 첫 단추부터 끼워가야 하는데 나는 자꾸 조급해져 욕심을 낸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를 생각하기 보단 이제부터 어떻게를 생각하자고 다짐하고 싶은데 아직 때가 아닌 듯 하다. 의사선생님이 지금은 다른 생각 할 때가 아니라 우선 죽지 않는 것이 유일한 목표라고 할 때 ‘에이, 말도 안돼’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었다니. ㅎㅎㅎ 4달째지만 여전히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은 낯설기만 하고, 끝모르고 가라앉는 마음은 어찌할 바 모르고 헤매이게 한다. 적응이 될까? 이 또한 내 자신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