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97년에 만들었다니. 진짜 왕가위 뭐지. 원제는 <춘광사설(春光乍洩)>이라는데, '구름사이로 잠깐 비치는 봄햇살'이라는 뜻이 마음에 든다.
자유로운만큼 불안해 보이는 보영을 한결같이 보듬고 기다려주는 아휘의 사랑이 애틋했으나 감정이 투사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둘의 성별이 모두 남자라는 게 컸다. 동등한 관계라 인식되니 그저 사랑하는 방식이 다른 연인이구나 싶어서, 편안하게 둘의 사랑의 서사를 훔쳐보았다.
첫번째로 나를 두근거리게 한 장면. 어이없이 헤어지고는 아휘가 일하는 바 앞에서 재회를 한다. 보영은 아휘에게 담배를 빌리며 끊임없이 아휘를 바라본다.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하고 서성이는 아휘의 시선도 너무 섹시했고 둘의 사랑이 얼마나 찐득한지 알 수 있었다.
"늘 그와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고독해지면 결국 똑같다는 걸 깨달았다."
영화를 보며 가장 마음에 남는 문장이었고, 아휘는 이 고백을 마지막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났고, 보영의 곁에서도 떠난다. 소중한걸 잃어야 성숙할 수 있다는 슬픈 역설을 영화 마지막 장면의 반짝였던 아휘의 눈빛과 뭔지모를 희망을 안겨주는 해피투게더 노래로 위로해주는 듯 했다.
여운이 많이 남고, 다시보면 또다른 느낌을 줄 것 같다. 왕가위 진짜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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