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의 차이 생각해보기
주인도덕 | - ‘좋음’이라는 판단은 호의를 받는 입장이 아닌 ‘좋음’을 느끼는 행위의 주체에서 비롯됨. 즉 좋음의 기원은 강자의 가치 부여에서 생겨나는 것. 그렇기에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한다. - 타인의 비난이나 칭찬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구성하는 자 - 자신이 지닌 고유한 능력과 힘을 긍정하는 인간 예를 들면 로마인 //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탁월함의 면에서는 NASA 연구원, 혹은 판사, 저열함의 면에서는 트럼프 정도이지 않을까? “거리의 파토스” : 주인도덕이 갖춰야 할 덕목(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내는 것, 타인을 향한 시선은 자신에게로 옮겨오는 것, 동정을 배제함) |
노예도덕 | 자신에게서 ‘좋음’을 발견하지 못함. (=자신을 긍정하지 못함) 그러므로 강자에게서 악을 발견하고 그 악에 대응하는 자기 자신을 ‘선한 인간’으로 규정. 강자에게 보복하지 못하는 것=용서 / 복종=순종 / 비겁함=겸손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는 능력을 상실 예를 들면 유대인(종교인) //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사이비종교의 교인들 “원한” : 노예도덕에 감추어진 근본적인 감정, 항상 어떤 적대적인 외부세계가 필요하다. “그의 영혼은 곁눈질 한다.” |
- 주인도덕이 옳고 노예도덕이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각각의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밝히는 것뿐이다. 그 너머의 것을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 ‘선’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걸고 싸울 용기가 없는 비겁하고 나약한 자들이 서로 싸우지 말자고 타협하여 이루어 낸, 즉 자신의 근원적인 힘에의 의지를 거세한 노예도덕에 불과하다고 여긴다면, 더 큰 권력을 얻고자 약소국과의 전쟁을 불사하는 나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지? 나의 고유한 능력과 힘이 타인을 공격하는데 쓰인다면?
- 대다수의 약자들은 다수의 합의라는 명목 아래 위선적인 규범을 만들고 이를 절대적이고도 초월적인 것으로 승화한다. 그리고 여기에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한다고 했을 때 바로 떠오는 것이 법령이다. 민주적 법치국가인 우리나라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즉, 주인도덕을 지닌 개인이 사회 구성원으로써 역할 할 때 법과 제도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 거리의 파토스
- 니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 마디로 한다면 “거리의 파토스”이지 않을까.
■ 동정에 대한 생각
* 사전적 정의: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엾게 여김.
- 쇼펜하우어는 동정을 도덕의 기초로 보았고 루소는 동정이 인간의 최대 가치라고 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동정을 경멸하였고, 푸코는 우리의 미덕이란 위장된 악덕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니체는 서로 다른 삶에서 동정이 성립할 수 있는지 반문하며 피상적인 동정을 혐오했다.
-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한 학문이라고 생각했던 사회복지에 배신을 느낀 경험이 있었다. 사회복지발달사 시간에 배운, 사회복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구빈법’이 제정된 이유가 빈민을 일반인들에게서 격리하여 구빈원에 수용함으로써 국가의 위상을 낮추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내용을 배우면서부터이다. 모든 인간은 존엄한 각자의 존재이며, 그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제도라고 믿어왔던 기둥이 무너졌다. 구빈법은 오히려 빈민을 양상 시켰고 같은 맥락에서 개인의 자선도 사회악이 될 수 있다. 니체가 동정을 부정하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힘이 있는 자가 약한 자를 보는 시선이 중요하다. 주인도덕을 가졌다면 상대도 주인도덕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는 자세와 같은 섬세한 감수성이 필요하다.
■ 착하게 사는 것과 바르게 사는 것
오래전 한 기사를 통해 교사의 부탁으로 수개월간 물을 떠다준 여학생이 실은 양변기의 물을 떠서 주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그 학생이 착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기에 교사의 충격은 더 심했다고 한다.
여러 논란이 있는 사건이지만 나는 그 시절 학교에서 소위 일진이라고 하는 부적응 학생들을 만나는 일을 하던 중이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앞에선 웃으며 뒷통수를 치는 사람들보단 위선적이지 않고 순수한 아이들이었지만 사회는 우리 아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지 않는다는 경험을 하며 보여지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여실히 깨달았다.
나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착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착하지 않아요. 저는 자기중심적이에요. 라고 아무리 말해도 나는 이미 그들의 기준에서 ‘착한’ 사람이었다. 놀랍게도 그들이 기대했던 그 ‘착함’의 경계에서 벗어나면 나는 그들에게 실망을 안긴다. 나는 하나의 형상인데 타인의 시선에 따라 선하거나 위선적이며, 이타적이거나 이기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착하다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떤 힘도 없다.
고귀한 인간에게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가치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삶을 확장하고 고양하기 위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규정하고 그런 가치를 창출하는 능력과 역량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인간은 '주권적 개인'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착하게 사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 어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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