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누군가와 나눈 대화에서 80년대 학생운동의 방향과 시대적 필요가 달라져가던 90년대 후반 운동권 세대들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선배들 때처럼 자본주의를 타파하자는 분명한 노선을 따르지도 못한 채 소멸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운 소회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내 읽게 된 이 글에서 나는 "공동체"라는 모형의 새로운 해석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마주하게 된 기분이다.
제현주님의 페북 글을 첨부한다.
'공동체'라는 말에서 떠올리게 되는 원형이 하나같이 억압적인 것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 단어를 계속 쓰는 게 맞는지 고민하게 되지만, '함께 필요를 해결하는 지속성 있는 네트워크'는 개인주의를 지탱하려면 오히려 점점더 필요해진다.
편의상 '공동체'라는 말을 쓰자면 ---
이 '공동체'가 억압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복수의 공동체에 자신을 위치키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의 공동체가 일상의 너무 많은 부분을 잠식하거나 개인의 정체성을 장악해버리는 순간이 위험하다.
공동체에 대해 선택의 여지를 가질 수 있는 조건이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개방성과 자율성을 높여준다. 동시에 공동체 밖에서의 삶에 기본적인 안전망이 보장되어야 한다. '보편 복지/공공 서비스'를 공동체로 해결하려 하는 순간, 공동체는 더 악압적이 될 수밖에.
'보편 복지/공공 서비스'는 국가가, '공동체'는 개인들이 알아서 -- 이게 기본 원칙이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다양한 '함께'의 실험들을 손쉽게 시작하고 또 떠날 수 있는 사회가 가능할 터다. 그때 비로소 '공동체'는 회복이 아니라 새로이 발명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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